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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중남미)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by blondjenny 2009. 11. 11.

 

 

프리다 칼로 박물관은 제가 꼭 들리고 싶어서 기사에게 부탁을 하여 찾아갔습니다. 블루하우스로 불리는
이 박물관은 실제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가 25년 동안 함께 했던 거처이기도 합니다. 영화 ‘프리다’
속의 모습 그대로 온통 파란 벽면에 집 안에는 프리다와 디에고의 그림 몇 점과 프리다가 교통사고 후
자화상을 그리는데 이용했던 침대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박물관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프리다의
초기 그림서부터 그녀의 평생의 작업을 볼 수 있는 공간였습니다. 이들은 각자 괄목할 만한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인정받으면서 한 편으로 치열하게 사랑한 평생의 동지였습니다. 여기 저기서 이들이 그린
그림을 모아 틈틈이 보여드리겠습니다.

프리다 칼로(1907-1954)는 멕시코의 여류화가이며 1907년 멕시코시티 교외의 꼬요아깐에서 출생했습니다.
독일인인 프리다 칼로의 아버지는 그에게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합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멕시코 혁명 당시 농민 지도자인 자파의 부하들을 보살펴준 것을 계기로 멕시코 청년

공산당에 가입하여 죽을 때까지 골수 스탈린주의자였습니다. 7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게 되었고,

1925년 18세 때 교통사고로 척추,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는 등 이

사고는 그의 삶 뿐만 아니라 예술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고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그의 작품세계의 주요 주제가 되었습니다. 1939년 르누와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하여 피카소,

칸딘스키, 뒤샹 등으로 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았으나 프리다 칼로 자신은 자신의 작품세계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둔 것이라며 정체성을 강하게

지켰습니다. 멕시코의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상징주의와 멕시코의 토속문화를 결합한 화가였습니다.

그녀는 항상 여사제처럼 전통 의상과 액세서리를 착용하였으나 사회 관습에는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에게는 20세기 여성의 우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작품으로는 사고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고자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했기 때문에 특히 자화상이 많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세 번에 걸친 유산과 남편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으며, 이는 고통스러운

재앙으로 받아들여져 '헨리포드 병원', '나의 탄생', '프리다와 유산' 등과 같은 작품들로 형상화되었습니다.

1970년대 페미니즘운동이 대두되면서 그녀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였습니다. 주요작품으로는 '두 명의 프리다', '내 마음 속의 디에고 자화상'이

있습니다.

디에고 리베라(1886-1957)는 멕시코 과나후아또에서 1886년 출생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나타냈으며, 10세에 산카를로스미술원에 들어가서 약 6년 간 엄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정부

장학금으로 유럽에 장기유학, 1907년 에스파냐에서, 다음 해에 파리로 옮겨 1914년까지 거의 그곳에서

보냈고, 파리 체재 중 피카소, 브라크, 클레 등과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입체파(큐비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벽화에 가장 깊은 감명을 받고, 멕시코 내란 종식과 함께 귀국하여

시케이로스 등과 미술가협회를 결성, 활발한 벽화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멕시코의 신화, 역사, 서민생활

등을 민중에게 직접 이야기할 수 있도록 공공건축물의 벽면에 감각적이고도 힘에 넘치는 벽화를

그렸습니다. 작품의 특색은 멕시코 민중에 대한 애정이 넘쳐 흐르고, 유럽 회화의 전통을 멕시코의 전통에

결합시키려 한 점에 있으며, 가장 멕시코적인 화가입니다. 대표작으로 프라드호텔의 대벽화 '아라메다

공원의 일요일의 꿈', '헬렌 윌스 무디의 초상', '농민지도자 사파타' 등과 중앙정청, 문교부, 차핑고농업학교

등의 벽화 및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주식거래소의 장식화 등이 있습니다.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는 1920년대 초반, 프리다가 다니던 학교에 디에고가 벽화를 그리게 되며 처음
만났습니다. 디에고는 그 때 이미 유명한 예술가, 사회주의자였고, 프리다는 소아마비, 교통사고의 고통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몇 년 후인 1929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21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했는데 디에고로서는 세 번째 결혼였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종종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으로 묘사되며

사랑과 증오가 교차하는 열정적인 결합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디에고는 여성 편력이 심했는데 심지어
프리다의 여동생과도 바람을 피웠습니다. 프리다는 디에고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그 또한 노구치, 트로츠키
등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기도 했습니다. 1940년 이혼했지만 다시 재결합한 후에 프리다는 블루하우스에
머물렀고 디에고는 산앙헬에 살면서 서로 다른 사람과의 연애를 지속했지만 결혼관계는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1954년 프리다는 블루하우스에서 사망했는데 마지막 일기장에는 '떠남이 즐겁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죽은 날을 '내 인생 가장 슬픈 날'이라고

표현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디에고는 1955년 딜러였던 여자와 다시 결혼했고 1957년 사망했습니다.
*위 사진은 프리다 칼로 박물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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