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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스페인, 포르투갈)

미스의 파빌리온을 보고

by blondjenny 2010. 4. 21.

 

제가 시카고에서 건축사 수업을 들을 때 대 건축가인 미스 반 데 로에에 대해 배우면서 바르셀로나의
파빌리온이 얼마나 중요한 건물인가를 귀가 따갑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에서 까딸루냐 미술관
근처에 미스의 파빌리온이 있다는 걸 알고 지하철을 타기 전에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지하철역
가까이 가자 파빌리온의 싸인이 보이더군요. 그러나 안내판을 따라 그 주위를 몇 번을 돌아도 찾을
수 없어 포기하려고 할 때 나즈막한 심플한 직선으로 이루어진 나무에 가린 한 건물을 발견했습니다.
강의실에서 영상을 통해 볼 때와는 달리 그 규모가 작아 눈에 잘 띄질 않았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부를 들어갈까 했더니 입장료가 비싸 그냥 겉에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돌아섰습니다. 비는 아직도 조금씩 왔지만 이제야 할 일을 다 한 듯 바르셀로나에서의 관광을 마치며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을 탔습니다.

루드비히 미스 반 데 로에(1886-1969)는 독일 태생의 미국 건축가로 흔히 미스(Mies)라고 불립니다.
미스는 1886년 3월 27일 독일의 국경에 있는 샤를마뉴 아헨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초등학교 교육 밖에 받을 수 없었지만 그는 소음과 먼지와 욕설 속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받은 건축가보다 건축재료나 시공에서 더 많은 지식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1930년 미스는 바우하우스
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밖에서는 나치가 공격해오고 안에서는 좌익계 학생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와중에 학교는 언제나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미스는 행정가로서 유능하진 않았지만, 엄격하면서도
훌륭한 스승으로 곧 학생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에서 미스를 만나 열렬한
옹호자가 된 미국 건축가 필립 존슨의 주선으로 나치즘을 피해 1937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1969년
시카고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미스는 극적인 명확성과 단순성으로 대표되는 20세기 건축양식을 만들어냈습니다.
우아하면서도 단순한 그의 직선적 건축양식은 1920년 대 말에 등장한 국제주의 양식을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거양식을 모방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대신 사용 재료의 특성을 명료하게 전달해
주는 기술적 수단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엄격한 표현을 선호하여 모든 장식을 거부하였습니다. 완숙기에는
공업용 강철과 판유리와 같은 현대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내부공간을 정의하였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훌륭한
선구적인 프로젝트들의 연작을 내놓았는데, 그 중 하나가 1929년에 지어진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의 임시
건물인 독일관(현재는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입니다. 이 건물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0년 째 되는 해,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이 국위를 걸고 건립한 파빌리온입니다. 박람회
이후 분해되었으나 원래 부지에 1988년 재건축되었으며, 근대 건축사상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 건물을 르 꼬르뷔지에의 사보아 주택과 더불어 근대 건축의 원리를 확립한
작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는 발터 그로피우스, 르 꼬르뷔지에와 함께 근대 건축의 개척자로 불립니다.
그의 유명한 격언인 'less is more'(적을수록 더 풍요롭다)와 'God is in the details'(신은 세밀함 안에

있다)는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