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그 할머니가 안 쓰는 물건을 정리하겠다며 주말에 집 마당에서 세일(yard sale)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미국에서는 봄이나 가을에 종종 자기 집 차고나 마당에서 안 쓰는 물건들을 파는 일이
흔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당에 차가 주차되어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 제 차를 집 옆 공터에 세워놓았어요.
일요일 오후에 세일이 다 끝난 것 같아 차를 다시 마당에 주차를 하고 나오는데 그 할머니가 '미세스 팩'
하고 부르더니 이틀 동안 차를 밖에 세워줘서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는 거예요. 전 오히려 당황스러워서
제대로 대답도 못했어요. 그 할머니의 그런 모습이 도저히 상상이 안됐거든요. 그런 다음 날 그 할머니가
일주일에 몇 번 일하러 오는 가정부를 시켜 레몬 케익을 하나 구워 보내셨어요. 케익은 딱딱하고
별로였지만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또 한 번은 제가 열쇠를 안에다 두고 문을 닫아서 할 수 없이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열쇠를 빌려 문을 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마음이 급해 마구 뛰어가니까 미끄러진다고
조심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이런 기억도 있습니다. 우연히 할머니와 마당에서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저와 제 아이가 서로 사이가 좋은 것 같다며 자기는 아이들하고 가깝지 않다고 하시는데 무척 외로워
보였어요. 전 이 할머니하고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처음 생각한대로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 보았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저를 부르시더니 자기가 몸이 안 좋아 병원을 자주 다녀야 해서
딸이 사는 뉴욕 근처에 작은 아파트를 얻어 이사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마 짐을 정리할
겸 세일을 했었나 봐요. 이사하는 날 저는 카드에 빨리 완쾌돼서 돌아오시라고 그 때까지 잘 지키고
있겠다고 써서 드렸더니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자기가 꼭 필요한 것만 챙기고 대부분 살림은 그대로
남아 있어 장식장 속에는 오래된 그릇들이 가득했고 벽에는 빛 바랜 사진과 앤틱으로 보이는
그림들이 여전히 빼곡히 붙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사를 가시고 그 큰 집에 저와 딸 둘이만
당분간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마음은 누군가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는
홀가분함에 너무 가벼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평화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위 사진은 미국에서 흔한 어느 집 차고 세일(garage sale)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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