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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미국)

미국 할머니와 함께 살기 4

by blondjenny 2009. 5. 7.

 

우리끼리만 산지 석 달쯤 됐을 때 주인집 딸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할머니가 크리스마스 며칠 전에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원래 암이였었대요. 편찮다고는 해도 돌아가실 줄은 몰랐는데 그 때 이사를

나가신 게 마지막였어요. 정이 많이 든 것도 아닌데 어쨌든 가까이 살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니

너무 기분이 이상했어요. 그 후 딸과 사위와 캘리포니아 사는 아들이 와서 대충 중요한 물건은

정리를 하고 뉴욕 사는 딸이 들어와 살 거라고 하더군요. 그 때까지 당분간 또 우리끼리 살게 됐지요.

문제는 추운 겨울였는데 난방용 기름이 떨어져서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는 일이 생겼어요. 할머니가

계실 때는 알아서 때 맞춰 기름을 채웠었는데 주인이 없으니 기름이 다 된 줄 몰랐던 거지요. 주인집

딸한테 전화를 하니 얼마 전에 채웠는데 우리가 히터를 너무 많이 튼 게 아닌가 하며 화를 내더라고요.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특별히 온도를 높인 적도 없어 억울해했지요. 그런데 기름 넣는 사람이 오더니

기름이 얼마 들어 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탱크가 두 개였는데 하나는 차 있고 하나는 비어

있어 빈 쪽에 넣어야 하는데 잘못 넣었나 봐요. 그 사람들이 가고 난 후 계속 기름 냄새가 올라와서 전

겁이 났어요. 이러다 불나면 큰일나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밤이 돼도 냄새가 가시질 않아 전 플래쉬를

들고 그 할머니 방과 부엌을 건너 지하에 있는 보일러실로 내려갔어요. 마치 영화 속 사건이 나는 그런
어둠 속의 계단을 내려가면서 아이가 있으니까 무서워도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제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불을 켜니 지하실 바닥이 온통 기름 천지였어요. 기름통을 잘못 알고 넣어 기름이 넘쳤던

거예요. 정말 불만 붙이면 폭발할 것 같았어요.

 

전 너무 무서워서 밤을 홀딱 새고 날이 밝자 주인집 딸한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빨리 와 보라고

했지요. 그 딸도 어머니를 닮았는지 너무 이른 시간에 전화를 했다고 짜증을 내는 거예요. 우린 한숨도 못

잤는데요. 사위가 와서 보고는 상황이 심각하니까 일하는 사람을 불러 부직포를 바닥에 다 깔아 기름을

빨아들이게 했어요. 우리는 그 추위에 창문을 다 열어 놓았는데도 냄새가 어찌나 독한지 며칠 동안 속이

울렁거려 낮에는 밖에 나가 있었어요. 그런 불편을 겪었는데도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흔히 내뱉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그 사람들을 보며 과연 미국이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일까 아니면 이

사람들이 특별한 사람들일까 의심이 들었습니다.
*위 사진은 집 뒷 마당에 핀 수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