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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이태리)

또 다시 마주한 폼페이의 모습

by blondjenny 2019. 2. 1.


폼페이는 오래 전 피렌체 출장이 끝나고 로마를 관광하면서 처음 갔었습니다.  현지 여행사를 따라 

갔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한국 관광팀을 따라 온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무척 반갑고 신기했었지요.  

폼페이에 대한 첫 인상은 굉장히 충격적였습니다.  용암으로 인해 살아있던 자의 모습이 그대로 

조각품처럼 굳어졌는데 너무 사실적이라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개까지 같이 묻힌 경우도 있었고 

어린 아이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 그대로 굳어진 모습였습니다.  바닥은 돌로 

만들어져 마차 바퀴에 홈이 파여 있었고, 상점들도 여럿 있었으며 부유한 상인이나 의사의 집도 

있었습니다.  그 벽이나 바닥에는 화려한 모자이크 타일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호기심을 갖는 매춘의 방도 보았습니다.  돌과 흙으로 만들어진 침대는 의외로 협소하고, 벽에는 

남녀의 성행위 자세가 돌아가며 그려져 있었습니다.


폼페이는 나폴리에서 남서쪽으로 23km 떨어진 베수비오 산 근처에 있으며, 사르누스(지금의 사르노) 강 

어귀 북쪽으로 흘러든 선사시대의 용암에 의해 형성된 돌출부 위에 건설되었습니다.  폼페이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격렬한 폭발에 의해 헤르쿨라네움 및 스타비아이와 함께 매몰되었습니다.  이튿날 화산 

폭발이 멈추었을 때 폼페이는 깊이 6-7m의 화산력과 화산재로 덮였습니다.  화산재에 묻힌 덕에 그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 지정된 세계 문화유산이자 이태리 내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입니다. 


매몰된 도시의 발굴은 오스트리아 점령기인 1709년에 헤르쿨라네움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폼페이는 1748년에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폼페이의 유적은 사르노 강으로부터 

토레안눈치아타 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라치비타라고 알려진 구릉 밑에 터널을 팠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1763년에 그 장소가 폼페이였음을 

밝혀주는 비문이 발견되었습니다.  


스타비아이와 그라냐노 근처의 발굴 작업은 카를로 4세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으며, 1749-82년에 

12채의 별장이 발굴되었습니다.  그 후의 발굴 작업은 금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재개되어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열주에 둘러싸인 2개의 큰 안뜰과 목욕탕이 있는 산마르크 별장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공공 건물들은 다른 지역에서도 발굴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것 보다는 수백 채의 민간 주택들이 더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민간 주택들이 독보적인 이유는 적어도 400년에 걸친 가정용 주택 

건축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이 오직 폼페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초기 주택들은 제1차 

삼니움 점령기(BC4-3세기)에 세워졌습니다.  도시 전역에는 수많은 작은 주택들도 있으며, 그 가운데 

많은 것이 상점입니다.  


그런데 그 오래 전에 처음 갔을 때는 훨씬 더 많은 부분이 개방되어 있었고 외국인 가이드의 설명도 있어 

천천히 둘러보았는데, 세 번째 방문인 이번에는 관람하는 부분이 많이 줄어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시간 상 생략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범위가 줄어들어 많은 아쉬움을 

안고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